먹튀검증 토토군 야설 15번째 소개팅
어른들의 야썰 단편 성경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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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씨밤바야 이번엔 진짜 잘해라. 진짜 괜찮은 애란 말이야. 좀 팍팍 밀어 붙혀봐. 알았지? 또 저번처럼 성의 없이 하면 디진다."
30대가 되었다. 그런데 게임에서 20레벨 대에서 30렙이 되었을 때 능력치가 대폭 상승하는 것과는 다르게 나는 그다지 바뀌지가 않았다. 여전히 주중에는 비실비실 대며 성의 없이 일을 하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왁자지껄 대며 술을 마시고, 낮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직장 선배에게 잔소리를 듣고, 밤에는 원기왕성한 자세로 인터넷을 하거나 게임을 하였다. 나는 그대로인데 친구들은 바뀌었다. 한 놈 한 놈씩 장가를 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동기 중에 장가 안간 사람은 나만 남아있었다. 그때부터 친구들의 소개팅 물량 공세는 시작되었다. 아직 결혼할 생각도 연애할 생각도 없는데 왜 이리 귀찮게 구느냐는 내 질문에 친구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야! 니가 결혼해서 다 같이 부부동반 여행을 다녀야 재밌을 거 아냐. 닥치고 올해 안에 빨리 장가가라. 내가 **콘도 회원권가지고 있다. 올 겨울에 거기 부부동반으로 스키 타러 가자. 뭐야? 스키 못 타냐? 좃빱새키 이 형님이 알려줄게. 크크."
내가 장가 가야하는 이유는 바로 친구들과 부부동반 여행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미친놈들.
아무튼 너무나 귀찮기만 한 열 네 번째인지 열다섯 번째인지의 소개팅. 친구 놈의 성화에 마지못해 나간 자리. 상대는 친구 녀석의 거래처 직원.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웃는 얼굴이 예쁜 아가씨였다. 별로 크지 않은 눈이 미소를 지을 때면 무지개 모양이 되어서 거의 감기다시피 하는데 보는 사람 기분을 흐뭇하게 하였다. 꽤 많은 아가씨들과의 소개팅을 해보았는데 상대의 이야기에 가짜로 웃는 이들을 보면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가식에 쩔은 타입들. 그에 반해 그녀는 눈으로 웃었다.
“원래 이렇게 조용하신가 봐요”
“네? 네. 제 친구들도 매번 투정 부리더라구요. 얘기는 안하고 듣고 있기만 한다고”
대답을 하고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조용한 웃음처럼 말투도 행동가지도 조용조용한 타입이었다. 그렇다고 내숭 떠느라 아예 말을 안 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자기 의사는 분명했으며 말은 또박또박 할 말만 딱 부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이 기묘한 부조화는 뭘까? 그동안 이상형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뭘까?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명품이니 뭐니 하며 과소비하는 것을 싫어하였고, 종교에 미친 듯이 빠져들지도 않았으며, 만남을 시작하기도 전에 별자리니 운세니 궁합이니 운운하며 우리 인연이 어쩌니 삼재가 저쩌니 하고 김을 빼는 미신 같은 것들은 믿지 않았다. 책 읽기와 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최근에 읽은 책은 나와 똑같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였다.
그렇다고 외모가 딸리는 것도 아니었다. 어깨 정도 내려오는 살짝 웨이브 펌을 한 듯한 머리, 귀에 걸린 수수한 귀걸이, 갸름한 턱선, 흰색 여성 정장 셔츠 옷깃 사이로 보이는 심플한 은색 목걸이, 진하지 않은 옅은 화장, 도무지 흠잡을 거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웃음은 여태까지 내가 보아온 여자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이었다.
나쁘다. 핑계 댈 거리가 없었다. 친구 놈이 이번엔 정말 작정하고 그 동안 내가 이상형이라고 말해온 아가씨를 소개한 것이다.
너무 오래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뜯어본 모양이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나도 같이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말을 꺼냈다.
"왼손잡이신가 봐요."
"아…아뇨 그냥 커피 마실 때만 왼손으로 들게 되더라구요."
"아…그러시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쳐다보다가 생긋 웃으며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딱히 더 할 말이 없어서 나도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살짝살짝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약지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은색 실반지가 있었다. 반지를 보고 있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나…결혼해'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그녀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은 한참 만지작거리던 커피 잔을 기울여 입에 조금 가져다 댈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것이다. 내가 쳐다본 것을 말을 하라는 재촉으로 알아들었는지 그녀가 입을 떼었다.
“진수씨도 조용하신거 같아요.”
“아뇨. 사실 술 마시면 말이 많아지는 편이에요. 술 마시러 갈래요?”
1분 1초도 여기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핑계거리 찾기를 포기했다. 그냥 내 쪽에서 미친 짓거리를 하고 빨리 자리를 깨고 싶었다. 그녀는 살짝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조금 이르지 않나요?”
확실히 이른 시간이다. 토요일 오후3시 에 만나 나이가 몇이고 어디 살고 무슨 일하고 따위의 호구조사를 겨우 끝낸 시간이었다. 딱 한 시간 지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불편하였다. 그냥 기분이 나빴다. 왜? 그냥 기분이 나빴다. 분명 내가 이상형이라고 말한 타입 그대로였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고 싶었다.
“저녁 먹기에는 더욱 이르자나요.”
그녀는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픽 하고 웃었다.
“네, 좋아요. 가죠. 술 마시러.”
별다른 반응 없이 선선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대한 것은 이게 아닌데…
맛있지도 않고 비싸기만 한 커피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갈건가요?”
커피숍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가 조금은 냉랭한 말투로 물어 보았다. 검은 정장 투피스 하얀 블라우스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무늬의 커피색 레깅스. 그녀의 차림새는 누가 봐도 BAR가 어울려 보였다.
“낮술은 당연히 막걸리죠. 저기 두부김치 잘하는데 알아요.”
그녀의 입꼬리가 또 한 번 올라갔다. 만족스럽다.
'그래 입으로만 웃어야지. 거 봐 아까 웃음은 가식이었어. 저게 저 여자의 진짜 웃음이야. 친구 놈아 너는 몰랐을 게다.'
겨우겨우 친구에게 핑계 댈 거리를 찾았다.
“그래요? 기대해 볼게요. 자 안내해 주세요.”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녀의 입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을 보니 웃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여자다. 이 상황에서 눈으로 웃다니... 내 표정이 이상했나 보다.
“왜요? 무슨 문제 있나요?”
“아…아뇨. 아닙니다. 가죠.”
성큼성큼 걸어서 앞장섰다. 20분이나 걸어서 단골집으로 향했다. 마을버스로 아마 두 정거장 거리는 될 것이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뒤에 따라온다. 아마 나라면 빡쳐서 뒤통수를 하이힐로 찍어 버렸을 것이다. 하이힐 신고 20분이나 경보 속도로 걷는 남자 뒤를 따라 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처음 만난 소개팅에서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2층에 위치한 동동주 집은 이제 막 열었는지 주인 아저씨가 테이블을 닦고 계셨다. 내가 들어가자 반갑게 맞이하신다.
“어~ 왔어.”
하지만 뒤따라온 그녀를 보자 안색이 바로 굳어지셨다.
“너! 어휴~ 장사 안 해, 이놈아.”
“네네. 두부김치 하나랑 동동주 주세요. 아저씨도 한잔 하실 거면 잔은 세 개 가져다 주시구요.”
주인아저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희가 환영 받는 첫손님인가 봐요. 여기 앉아요.”
대략 십여 명의 여자가 이 동동주 집까지 따라 왔었고, 그녀들은 여기 도착했을 때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여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었다. 지금 따라온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여유롭게 농담도 건네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녀가 화가 잔뜩 나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창가 자리에 앉아 그녀의 얼굴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런데 눈도 같이 웃는다. 이…이게 아닌데…거참 이 여자 뭐야?
“단골인가봐요. 기대 되는데요?”
그녀가 앉으면서 이야기한다. 양손으로 턱까지 괴는 폼이 진짜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네. 맛있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되요.”
그녀의 시선과 눈웃음이 부담스러워 자리에서 일어나 수저와 물수건 컵과 물통을 챙겨왔다. 대충 수저를 챙겨주고 물을 따라 주는데 여전히 그녀의 눈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다시 일어나 김치와 깍두기를 챙겨왔다. 그녀의 눈은 아직도 나를 보는 중이다. 샅샅이…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네? 네.”
“뭐가요?”
손으로 슥슥 비벼보았다. 얼굴에 묻은 것이라고는 약간의 개기름 정도?
“그…”
그녀의 말은 주인아저씨가 두부김치와 동동주를 가져오는 바람에 끊어졌다.
“주문하신 두부김치와 동동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아, 그리고 아가씨. 이 녀석이 성격이 참 좋은 놈인데 여자랑 올 데 안 올 데를 잘 몰라서 여기 온 거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아저씨…”
“아니에요. 저 동동주 좋아하는 걸요.”
겸양의 말이 아닌 진짜로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니 그녀의 눈이 진짜로 웃고 있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고 주인아저씨 또한 그렇게 느낀 듯 입이 헤벌쭉 벌어져서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이고, 뭐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 내가 직접 자랑하기 좀 그렇지만 우리 집 동동주 진짜 괜찮아요. 이게 진짜 포천에서 가져온 동동주인데 다른 가게랑 다르게 딱 동동주만…”
“아저씨.”
주인 아저씨는 자신이 오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아무튼 맛있게 먹고 가세요.”
“네.”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가식이 아니다. 기분이 나쁘다.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다가 오히려 내 표정 들켰나 보다.
“왜요?”
“아…아뇨 그냥요. 자, 한잔 받으세요.”
그녀의 사발에 표주박으로 동동주를 부어주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맛을 다신다. 진짜로 이 상황을, 소개팅 첫날 한 시간 커피 마시고 하이힐 신고 20분 걸어서 동동주를 먹고 있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녀는 잔을 들이 밀며 유쾌하게 말했다.
“첫 잔은 원샷이죠?”
'첫 잔은 원샷이야.'
또 환청이 들렸다. 눈을 부릅뜨고 깜빡여 보았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야.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친구가 소개 시켜준 거래처 여직원이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환청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눈에 띄게 움찔해버렸나 보다.
“왜요? 어디 안 좋으세요?”
“에…아 아니에요. 뭐 좋아요. 원샷하죠. 원샷”
잔을 슬쩍 들었다. 그녀도 잔을 들고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양손으로 약사발을 들이키듯이 동동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눈을 꼭 감은 채로 쉬지 않고 입안에 전부다 부어 넣었다. 나는 그녀가 동동주를 비워 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크으~ 음? 안마셔요?”
“아! 마셔요. 지금 마셔요.”
잔을 기울이면서 슬쩍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다 마시는지 감시라도 하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다.
잔을 내려놓았는데 두부김치가 젓가락에 들려서 불쑥 내 눈앞에 들이 내밀어졌다.
“자요.”
“아…네…”
조심스레 받아먹었다. 곁눈질로 그녀를 보자 내가 자신이 내민 두부김치를 먹은 것에 굉장히 만족하는 눈치다.
“동동주 진짜 맛있네요. 기대한 성과가 있는데요?”
“아…예 뭐 10년 단골이니까요.”
심드렁한 내 대답이 시원치 않은 듯 그녀는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는 창호지로 장식된 창문을 바라보았다.
“운치 있네요."
한마디 던지고는 손가락으로 창문틀의 나뭇결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나뭇결을 쓰다듬는 것이 이집에서 벌어졌던 10년 동안의 수많은 이야기를 알아내는 과정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그리고 집중하여서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가 창문 틀 한쪽을 다 쓰다듬을 때까지 나는 어떤 말이든 '운치 있네요.'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뭐, 동동주 집이니까요."
내가 생각해도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만족스러웠나 보다.
"네. 그래서 그런가 봐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런데…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이상하게도 쓸쓸함이 묻어났다.
"한잔 받아요."
그녀는 여전히 활짝 웃으며 내가 자신의 잔을 채워주는 동안 양손으로 사발을 꼭 잡고 있었다.
"제가 따라 줄게요."
내 잔에 채우려고 표주박을 기울이려는데 그녀가 거의 낚아채다시피 빼앗아서는 잔을 채워주었다.
"같이 마시는 사람이 자작하면 3년간 애인이 없데요."
미신 같은 것 믿지 않는다고 해놓고 그런 황당한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누가 그래요?"
"그냥 어떤 사람이요. 자요 짠~"
그녀는 이번에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말도 안돼요. 그런 게 어딨어요."
"진짜에요. 그리고 그거 알아요? 이거 이렇게 술잔 위에 각자의 젓가락을 올려놓고 두 사람 모두 바닥을 쳤을 때 젓가락이 안 떨어지면 사랑이 영원히 이루어진데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이번엔 환상이 보였다. 그녀 옆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내 말 안 믿는거야? 진짜야. 이렇게 해서 젓가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히 이어진데.'
'허이구 그런 게 어딨냐? 니 나이가 몇갠데 그런걸 아직도 믿냐?'
'진짜라니깐 와~ 봐봐! 됐어 됐어 안떨어졌어 와~'
내가 그녀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여자에게 꿀밤을 먹였다. 후드티를 입고 있는 그녀는 꿀밤을 맞으면서 귀엽게 입에 빼쭉 내밀었다. 동그란 눈의 그녀는 눈이 무지개 모양이 되어 웃으면서 좋아했다.
'치~ 오빠랑 나랑 영원히 안 떨어지게 되서 속으론 좋음시롱~'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사람 말 믿지 마요."
동동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두부김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렇죠? 그런 말도 안 되는거 믿으면 안 되겠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하는 사람이 한 말은 절대 믿으면 안돼요"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내 옆에 빈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인상 좋게 웃고 있던 아가씨는 온데 간데 없었다. 두 눈이 텅 빈 여인이 맥없이 앉아 있었다.
"그쪽은 그런 사람 없었어요?"
"있었죠. 아니 있어요."
"그렇군요…"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자작을 했다. 나도 자작을 했다. 우리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자작을 하고 한 번에 비워내고 또 자작을 하고 원샷을 하고 또 자기 잔에 스스로 따르고 바닥을 비웠다. 둘 다 말이 없었고 서로의 잔만을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잔인가에 겨우겨우 이자리가 소개팅 자리인 것을 기억하고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아무 이야기나 지껄여 보았다.
"베르테르는 왜 자살을 했을까요? 언젠가는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 커피숍에서의 기분 좋은 분위기로 되돌리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숍에 있었을 때처럼 기분 좋은 목소리도 흐뭇해지는 눈웃음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취해 있었다. 그녀의 눈은 메마르고 황폐해져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은 만날 자신이 없었을 거에요.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비교하게 될 테니 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3년이 지났다. 처음엔 인정하지 못하였지만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3년 전에 헤어진 그녀를 잊을 수 없다. 모든 여자를 볼 때 그녀를 기준으로 평가 한다. 그녀와 닮아서 싫다. 그녀와 닮지 않아서 싫다. 그녀가 생각나서 싫다. 그녀의 버릇과 똑같아서 싫다. 그녀처럼 웃어서 싫고 그녀처럼 웃지 않아서 싫다. 그녀처럼 다정해서 싫고 그녀처럼 다정하지 않아서 싫다. 그녀처럼 행동해서 싫고 그녀처럼 행동하지 않아서 싫다. 열다섯 번의 소개팅에서 단 한 명도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열다섯 번째의 소개팅에서야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 다들 그렇다고 해서 나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보내주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난 일이다. 말 그대로 쿨 하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3년이나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그녀를 붙들고 있다. 그녀와의 추억을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기억난다. 그녀의 모든 것이 이미 내 무의식 속에 박혀있다.
그리고 내 눈앞의 그녀 또한 그러하였다. 사랑하던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많은 남자와 헤어진 연인을 비교해 보았을까?
나와 그녀는 말없이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술이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워내는 약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예전에 사귀던 연인과 비교하며 아무 이유 없이 퇴짜를 놓을 것이 뻔한 무의미한 소개팅임을 알면서 나가듯이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산 위에 돌을 가져다 놓아 보았자 다시 굴러 떨어져서 헛수고가 되어 버려도 계속 돌을 굴려야 하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처럼 그렇게 동동주를 비워 나갔다.
미친 짓이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보내고 잊어버리고 지워 버려야 한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언제까지 헤어진 연인의 그림자와 추억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아직 젊고 창창하다. 헤어진 연인의 그림자에게 갇혀 우울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러고…힉…그러고 싶취 아나 힉…나…난 시러...힉…난 더 조응 사랑을 차즈꺼야 힉…"
어느 순간 말도 제대로 안 나올 만큼 취해 버렸나 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흑…흑…흑…흐어어엉 이 나쁜 새키야 왜 왜 흐엉엉엉 왜 갔어 왜 엉엉 갈려면 다 가지고 가지 왜 기억은 남기고 가 엉엉엉"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짜증을 폭발시켰다. 여자가 우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3년 전에 여자 친구와 헤어질 때 그녀는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왜? 왜? 자기가 떠나겠다고 해놓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떠나겠다고 해놓고, 왜 자기가 우는 건가? 그때 울어야 할 사람은 여자 친구가 아닌 바로 나였다. 그런데 되려 자기가 울다니… 내가 아직도 3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를 지워버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그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에 그녀가 흘린 눈물 때문이었다. 꼴 보기 싫다. 여자가 우는 것은 정말 꼴 보기 싫다.
"힉…이 시파…울지마 힉…왜 우러! 힉…울고 시푼건 다름 아닌 힉…나라구 나! 힉"
"엉엉엉엉 나쁜 새키야 엉엉 나뿐 노마 엉엉 나쁘은…우욱 우욱"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다 말고 헛구역질을 하더니 이내 바닥에 보기 좋게 빈대떡 한판을 부쳐 놓았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자 주인 아저씨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다. 멋쩍게 씩 웃어주고 그녀의 옆으로 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토악질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을 더 게워내더니 *마트 피자 한판을 만들고 나서야 멈추었다.
옆에서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보려 했지만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주소를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나쁜 새키 나쁜 놈'뿐이었다. 주인 아저씨의 도끼눈 시선이 무서워서 일단 그녀를 업고 가게를 나섰다. 완전히 술에 취한 그녀를 데려갈 곳은 주변의 모텔뿐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업어본 사람은 그 돌부처를 업고 가는 전래동화속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가벼워 보인 그녀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낑낑대며 겨우겨우 모텔 침대에 눕혀 놓았다. 그녀를 내려놓자 갑자기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온몸이 땀범벅이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눈꺼풀이 감겼다.
꿈.
꿈이었다.
꿈이 아니라면 3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부드럽게 천천히 쓰다듬었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데 그녀는 조용히 내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침대에 다시 눕혔다. 조용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얼굴을 쓰다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참지 못한 나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선희야…"
그 말이 도약선이 되어 불이 붙었다. 그녀의 입술은 바로 내 입술을 덥치듯 겹쳐왔고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놓아주지 않을 생각으로 꼬옥 껴안았다. 그렇게 사랑했던, 5년 넘게 사랑했던, 그리고 떠난 후에야 놓친 것을 후회한 그녀가 내 품에 다시 안겼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구석구석 빠짐없이 어루만졌다. 새끼발가락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키스하였다. 다시 한 번 그녀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이름을 불렀다.
"선희야…"
"진수씨…"
꿈결처럼 몽롱한 기운 속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를 품에 안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가 각인되어 더 이상 떠나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3년간 참은 욕정에 3년 동안 끓인 감정이 더해져 하늘을 올랐다. 그녀를 으스러져라 껴안으면서 폭발하였다. 몽롱한 기운에 사정을 하고 나니 더욱더 잠이 쏟아졌다.
"하아…하아…진수씨…그거 알아요? 나 당신 이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당신이 왼손잡이도 아닌데 커피 마실 때만 왼손 쓸 땐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소개팅 자리가 갑갑하다고 술 마시러 나가자고 할 땐. 혹시 그이가 성형 수술을 하고 나를 속이러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마저 했어요. 심지어 동동주 마시러 온 것 마저 똑같았으니까요."
"제 이름을 불렀을 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참 신기한 우연이네요. 당신과 헤어진 연인의 이름도 제 이름과 같은가 봐요."
"하지만…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당신의 그녀가 아니구요."
"당신은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남자 중 제일 괜찮은 사람 같지만 난 당신과 만날 자신이 없어요. 당신을 만난다면 그 사람의 기억을 잊어버리기는커녕 그 사람의 흔적을 찾을 것만 같아요."
"먼저 갈게요. 잘 자요."
볼에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그리고 조금 후에 문소리가 났다. 그것이…가장 기억에 남는 소개팅이었다. 뭐 당연히 애프터 신청은 없었다. 전화번호야 소개 받기 전에 받아 놓았지만 연락하지는 않았다.
6달 후.
그 소개팅 이후에도 나는 몇 번의 소개팅을 더 나갔다. 역시나 별반 소득은 없었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한다고 해서 바로 잊어버려지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은 쉽게 되지 않았다.
그날도 커피숍에 앉아서 소개팅을 하고 있었다. 상대 아가씨는 명품을 아주 좋아하였다. 그녀는 그 명품들과 그 명품을 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쉬지 않고 말을 하였다. 덕분에 나는 말을 거의 하지 못한 채로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자랑은 끝이 없어서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마시는 척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대각선 방향 테이블에서 피자 한판의 그녀를 발견하였다. 때마침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시선도 나와 마주쳤다. 픽! 그녀도 나도 동시에 웃어 버렸다. 그녀도 소개팅 하는 상대의 말이 지겨웠는지 입을 가리고 하품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짧은 시선에서 여러 가지 말이 오갔다.
'그때 잘 들어갔어?'
'응.'
'소개팅?'
'응, 그쪽도?'
'응. 그런데 정말 말이 많네.'
'응, 이쪽도.'
시선을 돌려 눈앞의 소개팅녀에게 말을 했다.
"제가 말이 좀 없죠? 사실 술이 좀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는 편이에요. 술 마시러 갈래요?"
"네? 지금요? 아니 아직 시간이 좀"
"저녁 먹기엔 더 이르자나요. 자 일어나세요. 가죠."
"네? 아…아니 죄송해요. 저 약속이 있어서 술은 안 될 것 같네요."
"아…그래요? 뭐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네 미안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소개팅녀는 약간 황당하고 화난 얼굴로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 피자 한판의 그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동동주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 잘 안 되네'
그녀는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그게 될 리가 없자나.'
손가락으로 잔을 잡는 시늉을 하면서 입으로 가져갔다.
'동동주 마시러 갈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커피숍을 나와서 담배를 한 까치 물었다. 한대 거의 다 필 즈음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서 담배를 빼앗아서는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꺼버렸다. 그녀였다.
"몸에도 안 좋은걸 피고 있어."
"이게 몸에는 안 좋을지 몰라도 정신 건강에는…"
"그만~"
그녀는 약간 씁쓸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하긴 담배 피는 남자의 변명은 거기서 거기일 테니 그녀의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이야기를 했겠지.
"생각나?"
"응…뭐야 왜 반말 하는 거야?"
"선희…아니 그쪽이 먼저 반말 했거든요?"
내가 이름을 부르다 잠깐 멈칫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동동주나 마시러 가자."
"그래 이번엔 또 그때처럼 토하지 말고"
그녀가 눈을 흘기며 찌릿하니 쳐다보았다. 마주보며 웃어주면서 팔짱을 끼라고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팔짱을 끼워 왔다.
나와 선희…아니 피자 한판의 그녀는 나란히 동동주 집을 향해서 걸었다.
모르겠다. 이 인연이 어떻게 될런지는. 그저 헤어진 연인의 채취를 가장 잘 기억해 낼 수 있는 상대끼리 만나서 옛 추억을 곱씹으며 새로운 사람에게 상처 입힐지 아니면 옛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사랑을 만들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추억의 동굴 속에 쳐박혀 옛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새로운 집착거리를 찾아서, 나와 그녀는 그렇게 동동주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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